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와카미 겐사이 (문단 편집) == 생애 == 부친 오모리 사다스케(小森貞助)와 모친 와카(和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오모리 히코지로(小森彦治郞)였으나, 카와카미 겐페이(河上源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카와카미 겐사이로 개명했다. 히고(肥後)의 양이파의 한 사람인 그는 문학은 토도로키 무헤이(轟武兵衛)에게, 병학은 미야베 켄조우(宮部鼎蔵)에게, 황학은 하야시 오우엔(林園)을 통해 익힘으로써, [[왕당파|근왕사상]]을 품게 된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검을 히토키리(人斬り)의 길로 빠져들게 했다. 1851년 쿠마모토 영주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수하에 들어간 겐사이는 에도에서 영주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군인)|페리 제독]]이 [[쿠로후네 사건|일본에 도착하였을 때]], 당시 겐사이는 에도에 있었다. 막부는 미국의 힘에 눌려 일련의 [[미일화친조약|불평등조약]]들을 맺어갔으며 이에 분노한 겐사이는 에도를 떠나 쿠마모토로 돌아와 학업에 정진하였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 에도로 다시 돌아갔다. [[안세이 대옥|안세이 숙청]] 당시 겐사이는 에도 내의 쿠마모토인 거주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사건 이후 도주한 일군의 암살자들이 이 거주지역으로 숨어들었고, 주민들의 동요를 진정시킨 겐사이는 이들에게 의사를 불러주고 차를 대접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겐사이는 평소에 자신이 이들의 뜻을 존경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1861년 겐사이는 쿠마모토 다이묘의 다른 가신의 딸인 미사와 테이코와 결혼하였다. 미사와는 나기나타를 잘 사용했던 무예가이기도 하였다. 부부는 곧 아들 겐타로를 낳았다. 아이는 병약하였지만 테이코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남았다. 1863년 29세의 나이로 구마모토 번친병에 선발되어 미야베 테이조(宮部鼎蔵) 등과 함께 간부로 추천을 받았다. 8월 18일의 정변 후 조슈로 옮겨가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의 경호를 맡았으며 1864년 6월에 [[이케다야 사건]]으로 [[신센구미]]에게 살해당한 미야베 테이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7월 11일 공무합체파이자 개국론자의 중진이었던 사쿠마 쇼우잔을 베고 나서는 다시는 살인검을 휘두르지 않았는데, '''"사람을 벨 때는 마치 인형을 베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쇼우잔을 벨 때는 달랐다. 처음으로 사람을 벤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필경 쇼우잔은 당대의 호걸이었을 것이다."'''라며 그때 일을 토로했다고 한다.[* 일화에 따르면 지사들의 술자리에서 한창 쇼우잔을 비난하자 갑자기 자리를 떴는데 잠시 후에 와서는 너희들이 말한 그놈이 이놈 맞냐며 그의 목을 가져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한창 쇼우잔을 비난하고 있을 때는 정작 거기 끼어드는 일 없이 입 다물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고.] [[조슈 정벌#s-3|2차 조슈 정벌]] 때는 조슈군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867년에 구마모토번으로 귀번했으나 당시 구마모토번은 좌막파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투옥되고 만다. 이 때문에 [[대정봉환]], [[왕정복고]], [[보신 전쟁#s-3.1|토바-후시미 전투]] 당시에는 감옥에서 보냈고 1868년에 좌막파였던 구마모토번은 겐사이의 힘을 빌려 유신 세력에 참가하려 했으나 겐사이는 이를 거절하고 만다. [[메이지 유신|유신]] 후 개국 정책을 내세우던 [[메이지 시대|메이지 신정부]]는 계속 양이를 주장하는 겐사이를 두려워했고 겐사이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 이경사건[* 1871년에 양이파의 공경 둘이 메이지 정부의 전복을 꾀한 쿠데타 미수 사건]과 참의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 암살의 혐의로 1871년 12월에 참수되고 만다. 보통 '사람 베는 겐사이', '칼잡이 겐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겐사이가 벤 인물로 확실한 것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뿐이고 언제 누구를 몇 사람이나 베었는지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막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검사중 하나였기에 그가 벤 사람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카와카미와 같은 칼잡이들을 싫어했던 [[카츠 카이슈]]를 만난 자리에서 카와카미는 "당신은 왜 그런 놈들을 베어 죽이지 않고 놔두십니까? [[고추]]나 [[가지(채소)|가지]]도 사람들은 잘만 따먹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그런 고추나 가지 같은 놈들입니다(あなたは、そう人を殺しなさらぬが、それはいけません。唐辛子でも、茄子でも、あなたは取ってお上んなさるだろう。 あいつ等はそんなものです)."라고 말했는데, 카츠 카이슈는 후에 카와카미가 참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카와카미의 죽음은 다 자업자득이라고 냉소하듯 말했다고 한다.] 키는 150cm 전후로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희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여성처럼 보였다고 한다. 도장에도 다니긴 했으나 죽도 검술은 서툴렀던 모양으로 매번 두들겨 맞는 편이었으나, 진검을 들면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다고 한다. 한쪽 무릎이 지면에 닿을 만큼 낮은 자세에서 칼을 뽑아 베는 것이 특기였는데 그런 그의 검법은 시라누이류(不知火流)[* 정확한 체계가 현존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암살에 특화된 기습적인 [[거합]]이라고 추정된다. 이를 재현하는 이들은 최대한 자세를 낮춰 [[거합]]으로 역가사베기를 가하는 공격법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키가 작다는 겐사이의 신체적 조건을 생각하면 타점이 더욱 낮은 상태에서 들어오기에 이를 막아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대체적인 구현 동작은 다음 재현 영상을 참조할 것. [youtube(SzPpbW4Sl2A)]]라 불려지며, 독자적으로 창안한 것이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